
기억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.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과 감정 역시 기억을 통해 관계의 일부로 남는다. 그렇다면 기억이 사라지거나 서로 다른 형태로 뒤틀린다면 그 관계는 이전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.
현재 일본에서 활동 중인 배우 유의봉이 지난달 22일 출간한 SF 장편소설 '엘리'는 이 질문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. 앞서 에세이 '행복의 기준'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 풀어냈던 그는 두 번째 책에서 SF와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선택했다.
'엘리'의 중심에는 사라진 기록과 어긋나는 기억이 있다.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기억을 따라가지만,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기억과 현실 사이의 틈을 마주하게 된다. 작품은 그 틈에 감춰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무엇을 기억하고,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다룬다.
SF라는 장르를 택했지만 작품의 무게중심은 미래 기술에 대한 묘사보다 사람에게 향한다. 기술과 환경이 변화하고 개인의 기억마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는 무엇으로 유지되는지, 기억을 잃은 사람을 이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이 이야기의 흐름을 이끈다.
이러한 설정은 '그녀는 대체 누구인가'라는 표지 문구와도 연결된다. 검은색을 중심으로 숫자와 기호를 배치한 표지에 붉은 리본과 조명을 더해 작품 속 불확실한 기억과 인물을 둘러싼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.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기록과 기억 사이에 놓인 단서를 따라가며 인물의 정체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.

특히 이번 작품에는 배우로 활동해 온 유의봉의 경험도 반영됐다. 배우는 작품마다 자신과 다른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고, 그 인물이 바라보는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. 유의봉은 연기를 통해 반복해 온 이러한 과정을 이번에는 소설 속 인물을 구축하고 그 내면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옮겼다.
유의봉은 “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며 늘 누군가의 삶을 살아왔다. 한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고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상상해 왔다”며 “이번에는 글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따라가 봤다. '엘리'는 제게 소설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 기록이기도 하다”고 말했다.
배우가 대본 속 인물을 해석하는 작업에서 직접 인물과 세계를 만드는 작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도 이번 작품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. 정해진 이야기를 연기로 표현하는 대신 인물의 기억과 관계, 사건이 움직이는 방향까지 직접 설계하면서 창작자로서 또 다른 방식을 택했다.
'엘리'가 다루는 기억의 문제는 결국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.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,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감정과 관계가 남을 수 있는지를 SF 미스터리의 구조 안에서 풀어낸다.
유의봉은 “'엘리'를 통해 제가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”고 전했다.
한편 유의봉은 일본에서 배우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집필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. SF 장편소설 '엘리'는 알라딘, YES24, 교보문고, 11번가, 쿠팡 등 주요 온라인 판매처에서 판매되고 있다.


